📌 공시(Disclosure) 본 글은 제약·동물의약품 업계에서 24년간 근무한 작성자가 영양학적 자료와 IVETF·ACVIM·FDA 등 공식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작성한 정보성 콘텐츠입니다. 본 글은 특정 브랜드의 광고·협찬을 받지 않았으며, 언급된 의약품은 모두 정보 제공 목적입니다. 반려동물의 발작·간질이 의심되는 경우 반드시 수의사와 직접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깜순이의 그날

깜순이는 저와 16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입니다.
어느 날 자고 있는 깜순이의 다리가 유난히 뻣뻣하더라구요. 마치 사람이 대강직 발작을 일으킬 때처럼 사지가 굳어 있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꿈을 꾸나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사람 간질약을 14년이나 영업했던 사람이, 정작 자기 강아지의 발작은 알아보지 못한 거죠.
며칠 뒤 다른 일로 홍제동의 한 동물병원에 들렀다가, 원장님께 그 이야기를 슬쩍 꺼냈습니다. 돌아온 답은 짧지만 분명했습니다. “그건 잠꼬대가 아니에요. 발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한 마디에 머리가 멍해지더라구요. 14년간 사노피에서 사브릴(비가바트린)과 데파킨(발프로산)을 다뤘던 저조차도, 강아지의 간질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걸 그때서야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글은 그 인정에서 출발합니다. 사람 간질과 강아지 간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사람약을 강아지에게 그대로 써도 된다”는 흔한 오해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를 함께 공부해 보시도록 하시죠.
1. 사람 간질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사노피 근무 시절 배웠던 사람 간질의 기본 분류는 이렇습니다.
첫번째, 열성경련(Febrile Seizure)은 영유아기에 발열과 함께 나타나는 단기 경련인데요, 대부분 후유증 없이 잘 회복되고 만 5세 전후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거든요. 그래도 항상 예의주시 하셔야 해요. 수면중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호흡이 막힐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발작(Seizure)은 일회성 또는 특정 원인에 의한 단발성 경련을 말합니다.
세번째, 뇌전증(Epilepsy)은 그 발작이 반복적·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약물도 다르고 예후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어떨까요?
2. 잠깐 — 강아지에게도 열성경련이 있을까요?
저희 두 자녀도 돌 무렵 열성경련 때문에 응급실을 여러 번 다녔습니다. 다행히 몇 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사라지더라구요. 그래서 보호자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겁니다. “강아지도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강아지에게는 사람과 같은 의미의 “열성경련”이라는 진단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제수의간질연구회(IVETF)의 2015년 분류에도 없고, MSD 수의편람에도 별도 항목이 없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강아지의 뇌는 사람 아기처럼 발열에 취약한 미성숙 신경 구조 단계를 거치지 않습니다.
둘째, 강아지가 발열 중 발작을 일으킨다면 그건 “열 때문”이 아니라 “그 열을 일으킨 원인 질환 때문“으로 봅니다.
대표적인 예가 디스템퍼(개 홍역) 바이러스 감염이에요.
그럼 어린 강아지(생후 6개월 미만)가 발작을 일으키면 무엇이 원인일까요?
가장 흔한 건 저혈당입니다. 토이 푸들, 요크셔, 치와와 같은 소형견에서 끼니를 거르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자주 발생합니다. 그 외에 디스템퍼, 수두증, 간문맥단락증, 중독 등이 어린 강아지 발작의 주요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강아지가 발열과 함께 발작을 일으켰다면 “곧 괜찮아지겠지”가 아니라 즉시 동물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사람의 열성경련처럼 자연 소실되는 것을 기대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3. 강아지 간질의 분류 — IVETF 2015 기준
열성경련은 강아지에게 없지만, 사람의 뇌전증에 해당하는 만성 간질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분류 방식이 좀 다릅니다.
국제수의간질연구회(IVETF)는 2015년에 강아지 간질을 세 가지로 분류했어요.
특발성 간질(Idiopathic Epilepsy)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인데, 유전적 소인이 의심되고 보통 1~5세 사이에 첫 발작이 나타납니다. 가장 흔한 유형이에요.
구조적 간질(Structural Epilepsy)은 뇌종양, 뇌염, 뇌 기형 같은 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원인 불명 간질(Epilepsy of Unknown Origin)은 구조적 원인이 의심되지만 검증되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호발 견종으로는 비글, 골든리트리버, 래브라도, 보더콜리, 푸들, 저먼셰퍼드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 두실 점은, 7세 이후에 처음 발작이 나타난다면 특발성보다는 구조적 간질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니어견은 노령견의 건강 관리 차원에서 정기적인 혈액검사와 심장 검사를 함께 받아두시는 게 좋습니다.

이 분류를 머리에 넣고 깜순이의 그날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니, 비로소 그게 어떤 발작이었는지 가닥이 잡히더라구요.
4. 강아지 발작은 실제로 어떻게 보일까요
강아지의 발작은 크게 전신 발작과 국소 발작으로 나뉩니다.
전신 발작에서는 의식 소실, 사지 강직, 율동적인 다리 움직임(paddling), 입에서 거품, 침 흘림, 대소변 실수, 안구 회전이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나타납니다. 깜순이의 다리가 뻣뻣했던 것도 전신 발작의 강직기(tonic phase)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았던 겁니다.
어떠세요? 사람의 발작증상과 다르지 않죠.
국소 발작은 한쪽 안면 경련, 한쪽 다리 떨림, 반복적인 씹는 동작처럼 신체 일부에서만 나타나는 발작입니다. 의식이 유지되기도 하거든요.
발작이 끝난 뒤에도 강아지는 멍하거나, 한쪽으로 빙빙 돌거나, 시각이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걸 발작 후기(post-ictal phase)라고 부르는데요, 보통 몇 분에서 몇 시간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보호자가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뭘까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능하면 영상을 촬영해 두세요(수의사 진단의 핵심 자료가 됩니다).
둘째,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발작 시작 시간과 지속 시간을 기록하세요.
셋째, 주위 위험물을 치우고 강아지가 다치지 않도록 해주세요.
다만 입 안에 손을 넣으시면 안 됩니다. 강아지는 사람과 달리 발작 중 혀를 깨물어 질식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보호자가 물릴 위험만 있거든요.
5. 사람 간질약 vs 강아지 간질약 — 핵심 비교표
발작이 확인되면 다음 질문은 치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호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시는 게 하나 있어요. “사람 간질약을 강아지에게도 그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입니다.
참고로 아래 약물은 모두 처방약이라 수의사가 진단 후 직접 처방해 주시는 약들입니다. 보호자가 직접 선택하실 일은 없지만, 어떤 약이 쓰이고 어떤 약은 쓰이지 않는지 큰 그림으로 알아두시면 진료 받으실 때 도움이 되거든요.
| 약물 | 사람 사용 | 강아지 사용 | 비고 |
|---|---|---|---|
| 페노바르비탈 | ○ | ◎ 1차 약 | 가장 오래된 표준 치료제 |
| 브롬화칼륨(KBr) | × (구식) | ◎ 1차 약 | 2021년 FDA 조건부 승인 |
| 레비티라세탐(케프라) | ○ | ◎ 2차 약 | 응급·추가 약물로 광범위 사용 |
| 조니사마이드 | ○ | ○ 2차 약 | 페노바르비탈 보조 |
| 디아제팜(바리움) | ○ | ○ 응급용 | 직장 투여 가능 |
| 이메피톨 | × | ○ (유럽) | 강아지 전용 |
| 발프로산(데파킨) | ○ | ✕ | 반감기 너무 짧고 간독성 |
| 비가바트린(사브릴) | △ (난치성) | ✕ | 시야 협착 부작용 |
페노바르비탈, 브롬화칼륨, 레비티라세탐은 같은 성분을 강아지에게 그대로 씁니다(다만 용량과 모니터링 방법은 다르거든요). 반면 발프로산과 비가바트린은 강아지 표준 치료제 목록에 아예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6. 강아지에게 쓰면 안 되는 사람약 — 사브릴과 데파킨 이야기
비교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줄, 사브릴(비가바트린)과 데파킨(발프로산). 이 두 약은 제가 사노피에서 직접 다뤘던 약입니다.
비가바트린(사브릴)은 사람에게도 일반적인 항경련제가 아니에요.
돌도 안 된 갓난아기에게 나타나는 특수한 뇌전증의 1차 치료제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영아연축(Infantile Spasm)’ 또는 ‘웨스트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요, 아기가 갑자기 몸을 굽히거나 팔다리를 움찔거리는 짧은 발작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무서운 질환이거든요. 한국에서도 서울 소재 대형 대학병원의 소아신경과를 중심으로 처방되어 왔어요.
영아연축은 치료가 1~2주만 늦어져도 영구적인 인지 장애로 이어지는 무서운 질환이라, 치료를 받기 위해 보호자분들이 절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에는 잘 알려진 부작용이 하나 있어요. 바로 시야 협착(Visual Field Defect), 주변시야가 영구적으로 좁아지는 증상이거든요. 한 번 손상되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다른 약이 다 실패했거나 영아연축처럼 약 자체가 1차 치료인 특수한 경우에만 씁니다. 강아지에는 이미 검증된 1차 약물이 충분히 있으니 굳이 쓸 이유가 없는 거에요.
발프로산(데파킨)은 사람에서 전신발작이나 양극성장애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표준 약물입니다만, 강아지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의 반감기는 9~16시간인 반면, 강아지는 평균 1.4시간(범위 1.0~1.8시간)에 불과합니다. 약효 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거든요. 거기다 간독성 위험까지 있어서, MSD 수의편람도 “강아지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 명시하고 있어요.

결국 핵심은 이겁니다.
같은 성분이라도 종(species)이 다르면 약동학과 안전성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7. 보호자가 알아야 할 진단·치료의 흐름
강아지가 발작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였다면, 동물병원에서는 보통 이런 절차를 거칩니다.
신경학적 검사 → 혈액·생화학 검사 → MRI → 뇌척수액 검사 순서지요. 특발성 간질은 “다른 원인을 모두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단합니다.
IVETF가 권고하는 치료 시작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6개월 내 2회 이상 발작, 5분 이상 지속되는 발작(중적상태, status epilepticus), 24시간 내 군발 발작(cluster seizure).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항경련제 투약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집에서 보호자가 할 일은 발작 일지를 쓰는 거예요. 발작 시간, 지속 시간, 직전 상황(식사, 스트레스, 수면 여부), 발작 모습, 회복까지 걸린 시간. 이 기록이 수의사가 약물을 조정할 때 결정적인 자료가 되거든요.
깜순이와 함께
사람 간질약을 영업하던 사람이 자기 강아지의 발작을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 글의 가장 솔직한 출발점인지도 모르겠어요. 보호자의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의학적 권위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 부끄러움에서 나온 결론이거든요.
혹시 우리 아이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시면, 영상 한 컷이라도 찍어서 가까운 동물병원에 들고 가보세요. 진단의 시작은 바로 거기서부터입니다.
참고 자료
코넬대학교 수의과대학 — 강아지 특발성 간질 — 미국 코넬대학교 라이니 강아지 건강센터에서 보호자를 위해 작성한 특발성 간질 안내문. 호발 견종, 첫 발작 연령, 가정 내 응급 대처법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국제수의간질연구회(IVETF) 합의 보고서, 2015 — 강아지 간질의 정의·분류·진단·치료에 관한 전 세계 수의 신경학자들의 합의 문서. 현재 강아지 간질 진료의 국제 표준이며, 본문의 “특발성·구조적·원인 불명 간질” 3분류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ACVIM 강아지 발작 관리 합의 성명서, 2016 — 미국 수의내과학회(ACVIM)가 발표한 강아지 발작 약물 치료 가이드라인. 페노바르비탈, 브롬화칼륨, 레비티라세탐 등 6개 항경련제의 사용 기준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MSD 수의편람 — 동물용 항경련제 — 60년 넘게 이어진 세계 수의사들의 표준 참고서. 본문에서 인용한 “발프로산은 강아지에서 효과가 떨어져 거의 사용하지 않음”의 출처입니다.
미국 FDA, 브롬화칼륨(KBroVet-CA1) 조건부 승인, 2021 — 2021년 1월, FDA가 강아지 특발성 간질 치료제로 브롬화칼륨을 공식 승인한 발표 자료. 강아지 1차 치료제의 공식 근거가 되었습니다.
강아지 저혈당의 원인·관리·진단 (PMC, 2018) — 어린 강아지 발작 원인 보강
사진 출처(Image Credit): 본 포스팅의 이미지는 Pixabay 및 Unsplash,Pexels의 무료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작성자 정보: 다국적회사 제약 영업 14년 + 동물의약품 유통 총괄 10년 경력자(전 사노피, 에스틴 근무)가 전하는 더 많은 이야기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